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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폭동, 역사 기록으로 남긴다

4.29 LA폭동의 역사를 남기는 박물관 건립이 추진된다. 오늘(25일) 오후 6시 LA한인타운 내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폭동 20주년 기념식 및 세미나'를 개최하는 4.29 LA기념재단(이하 4.29재단 회장 허종)은 앞으로 역사자료를 보관하고 남기는 작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허종 회장은 "LA폭동이 발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당시 한인 커뮤니티가 입은 피해 등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없다"며 "후손들에게 당시 자료를 제대로 물려주려면 기록 보관이 우선이다. 박물관을 세워 제대로 된 역사를 남기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 열리는 기념식 역시 "폭동 피해자들이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선 모습을 커뮤니티에 알리고자 마련했다"며 "많은 한인이 참석해 격려하고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기념식 후 세미나에서는 박계영 UCLA 인류학과 교수와 적십자 자원봉사자 양현승 목사 허 회장이 발표자로 나와 4.29 폭동의 의미와 한인 커뮤니티의 변화를 설명한다. 특히 당시 폭동 피해자였던 허 회장은 폭동의 현장과 피해를 당한 후 20년 동안 살아온 삶을 들려준다. 한편 4.29재단은 한미교육연구원(원장 차종환 박사)과 한인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과 함께 폭동 20주년 자료집 '잊을 수 없는 그날 1992년 4월 29일 화합 단결 그리고 미래로'를 발행했다. 자료집에는 폭동 원인과 피해 규모 한인 언론 보도 기록 등을 담았다. 또한 20주년을 맞아 한인 커뮤니티에서 진행되는 각종 행사 내용도 수록했다. 차종환 박사와 민병용 관장은 "2세들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커뮤니티 역사에 대한 의식은 다소 낮다"며 "2세들에게 폭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자료집을 만들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자료집은 기념식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예정이다. ▶문의: (213)385-4279 장연화 기자

2012-04-24

[4·29 폭동 20주년…줄잇는 행사] 워커톤(Walk-A-Thon)

4.29 LA폭동 20주년을 맞아 오는 28일 오전 그리피스 공원에서 열리는 파바월드(PAVA.회장 강태흥)의 '워커톤(Walk-A-Thon) 및 공원 청소' 행사에 참여하는 한인 기업들이 늘면서 참가 인원도 커지고 있다. 파바월드에 따르면 아시아나동우회와 윌셔스테이트은행이 워커톤 행사에 참가한다. 아시아나는 전 직원 참여의 뜻을 나타냈고 윌셔스테이트은행도 2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동아제약은 바카스 1500병 지원을 약속했고 LA한인상공회의소는 병물을 준비한다. 파바월드 산하의 커뮤니티 긴급재난구조단(CERT) 소속의 자원봉사자 40명은 주차와 마라톤 행사 안내를 담당한다. 파바월드 강태흥 회장은 "폭동의 아픔을 도약과 화합으로 승화시키고 한인사회의 온정을 불우 아동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있는 잔치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파바월드.메이크어위시(Make-A-Wish) 등이 공동 주최하고 중앙일보.라디오 코리아 등이 미디어 후원하는 이날 행사는 크게 2가지로 나눠 진행된다. 첫번 째는 공원 청소로 오전 8시 '크리스탈 스프링 피크닉' 구간을 2시간 동안 청소할 예정이다. 폭동의 아픔도 깨끗이 치유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라톤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 윌슨과 하딩 골프 코스에 있는 하이킹 트레일 3마일 거리다. 이날 마라톤은 뛰는 대신 이웃과 함께 걷는 시간으로 준비됐다. 파바월드의 팀 송 사무국장은 "행사 당일 날씨가 상쾌해 걷기 좋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파바월드는 행사 수익금을 어린이 환자를 돕는 비영리재단인 메이크어위시 재단에 전달한다. 특별 후원 단체는 LA시 4.10.13지구 시의회 사무실 LA평통 밝은미래재단 수요산악회 등이며 상품 후원은 남가주한인레스토랑협의회와 남가주한인치과협회 한국상사지사협의회(KITA) 등이 맡는다. 가주한의사협회는 의료지원에 나선다. ▶참가 문의: (213)252-8246 장연화 기자

2012-04-23

[LA폭동 20주년 행사 봇물] 잊지말자 4·29…함께하자 4·29

1992년 4월 29일. LA일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구타한 백인 경찰 4명이 무죄판결을 받자 흑인들은 거리로 나와 폭력 방화 약탈 등을 자행하며 분노를 터트렸다. 분노 표출의 주 대상은 한인이었다. 사우스LA를 중심으로 LA일대에서 피해를 입은 한인 업소는 2800여개에 달했다. 2012년 4월 29일. 4.29 LA폭동이 일어난지 20년이 흘렀다. 20년을 맞은 4.29는 단순히 이를 기리는 행사에서 나아가 인종화합을 위한 방법과 방향을 짚어보는 의미를 더한 행사들로 풍성하다. ◆학술대회 4.29를 계기로 한인 커뮤니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는 컨퍼런스가 열린다. 컨퍼런스에서는 4.29를 대면하다(Confronting 4.29)라는 주제를 놓고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제리 강 UCLA 법대 교수 박계영 인류학 교수 등 학계와 이경원 원로 언론인 카니 강 전 LA타임스 기자 강형원 전 LA타임스 사진기자 등 언론 한인타운 상황을 주류 언론에 알린 앤젤라 오 변호사 당시 소방대원으로 한인타운에 출동한 에밀 맥 LA소방국 부국장 당시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관장으로 한인 피해자를 도왔던 김봉환 LA주민국 국장 알렉산더 서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소장 등 커뮤니티 멤버가 20년 전 4.29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앞으로 한인 커뮤니티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한다. 컨퍼런스는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주최로 28일 오전 9시부터 LA한인타운 가든스위트호텔에서 열린다. 4.29기념재단(회장 허종)은 한미교육연구원(원장 차종환) 한인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과 공동으로 25일 오후 6시 옥스포드팔래스호텔에서 4.29 기념식 및 세미나를 개최한다. 기념식에서는 폭동 피해 당사자들이 나와 20년 전 상황을 되새기고 세미나에서는 박계영 UCLA 인류학 교수 미적십자 양현승 목사 등이 나와 4.29폭동이 남긴 사회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한인 커뮤니티 뿐 아니다. USC 주최로 28일 오전 9시~오후 4시30분 데이비슨 컨퍼런스 센터에서도 4.29 컨퍼런스가 열린다. 민족학교가 패널로 참여한다. 이에 앞서 25일에는 캘스테이트 노스리지(CSUN) 언론학과가 주최하는 컨퍼런스가 있다. 치유의 소리(Sounds of Heal)라는 주제로 오후 4시부터 CSUN 퍼포밍 아트센터에서 폭동 당시 보도된 라디오 뉴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27일에는 한인기독교커뮤니티개발협회(KCCD.회장 임혜빈)가 참여하는 리더십 대담 20년 후 대화의 날(20 Years Later: A Day of Dialogue)이 오전 9시~11시30분 페임 르네상스(1968 W. Adams Blvd)에서 진행된다. 한인 교계도 4.29로 뭉쳤다. 기독교.천주교.불교.원불교 등 한인 교계는 5월부터 4.29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10월 5일 4.29를 역사 인종 종교적으로 재해석 재조명하는 4.29 종교포럼을 개최한다. ◆문화행사 4.29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며 토론하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25~28일 CGV에서는 오후 7시부터 데이비드 이 변호사가 폭동 당시 정황과 폭동 전후 한인 커뮤니티의 모습을 담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컬러의 충돌(Clash of Color) 시사회가 열린다. 최근 전개된 LA한인타운 선거구 단일화 캠페인 과정과 의미를 담은 다큐멘터리 20년 후 코리아타운(Koreatown 20 Years Later)도 상영된다. 25일에는 시사회 후 정치인과 폭동 당시 현장을 취재한 언론인을 초청해 한인 커뮤니티에 비전을 제시하는 토론회가 진행된다. 이외 28일 오전 9시부터 샤토 레크리에이션센터(3191 W. 4th St)에서는 재미대한권투협회(회장 정왕기) 주최 제 19회 4.29 폭동 메모리얼 인종화합 권투대회가 같은 날 오전 28일 오전 11시~오후 2시 댄스 스포츠 아카데미 홀(1421 S. Western Ave)에서는 김동실 라인댄스클럽 주최 한흑 친선 라인댄스 모임이 있다. 지난해 말부터 4.29 20주년 캠페인을 펼쳐온 KCCD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30일부터 아트 추모 전시회 'Civil Space: A Transformative Memory of the 1992 LA Riots'를 개최한다. 30일 오후 5시 관용박물관(Museum of Tolerance)에서 리셉션이 있다. ◆각종행사 파바월드(회장 강태흥)는 한인 커뮤니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화합과 사랑을 다지는 걷기대회(워커톤)와 공원청소를 메이크어위시와 함께 개최한다. 폭동의 아픔을 치유하자는 의미로 28일 오전 8시부터 그리피스 파크를 청소하고 오전 11시~오후 2시 그리피스 파크 일대 5마일을 걷게 된다. 특히 걷기대회 참가비로 걷힌 수익금 일부는 메이크어위시 재단에 기부돼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행사에는 LA시 4.10.13지구 사무실을 포함해 LA민주평통 LA한인상공회의소 윌셔센터/코리아타운주민의회 밝은미래재단 수요자연산악회 등이 참여한다. KCCD는 29일 오후 3시30분 LA다운타운 주님의 영광교회(1801 S. Grand Ave)에서 한인과 흑인은 물론 다양한 커뮤니티를 아우르는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개최한다. 존 트라스비냐 연방 주택도시개발국 차관 존 페레즈 가주 하원의장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 LA시장이 연설자로 나서는 기념행사에서는 LA커뮤니티 희망의 영웅 시상식이 함께 열리며 러브인뮤직과 크렌쇼 엘리트 콰이어의 합동 공연도 있다. 이후 모두가 하나가 돼 다운타운과 한인타운 일대를 걷는 평화 대행진을 펼친다. LA시장실은 5월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겸해 27일 시청에서 4.29를 기리는 리셉션을 갖는다. 매년 한인 1.5~2세를 대상으로 실시해온 4.29 LA폭동 에세이 콘테스트 시상식을 29일 오후 1시~4시 LA한인타운 내 로버트 케네디 커뮤니티 스쿨에서 진행한다. 이재희 기자 jaeheelee@koreadaily.com

2012-04-23

"곳곳서 총성…폭동 현장은 전쟁터 방불"

4·29 폭동 2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일, 샌타애나 경찰국에서는 뜻깊은 기념식이 거행됐다. 폭동 진압을 위해 LA에 파견됐던 샌타애나 경찰 30명이 LAPD로부터 공로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LAPD 측의 지원 요청으로 작전에 투입된 샌타애나 경찰은 약 80여 명. OC레지스터는 20일자로 당시 긴박했던 순간들을 그들의 입을 통해 보도했다. 공로상을 전달한 LAPD 찰리 벡 국장은 “타지역에서 지원해준 동료 경찰들 때문에 어둠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했다”며 “그들이 없었다면 도시가 다시 안정화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존 폴로(당시 SWAT팀 소속 수사관ㆍ은퇴) - 폭동이 시작될 무렵 나는 아내와 함께 TV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고 있었다. 큰 일이 났다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본부로부터 전화가 올 것을 예감했으며 아니나 다를까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동료와 함께 크렌쇼 불러바드와 슬로슨 애비뉴 인근에 배치됐다. 당시 주변에는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 올랐고 상점 유리를 깨고 물건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마침 약탈 용의자를 잡아 현장에서 조사를 진행하던 중 어디선가 총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10피트 옆에 총알 자국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우리가 여기서 활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력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짐 스나벨(현 커맨더) “현장에 배치를 받았을 때 마치 전쟁터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온천지에 불이 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뛰어다니고 총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폭동 당시 나는 마약 수사대 사복 수사관으로 근무 중이었다. LA 파견 명령을 받고 동료와 크랜셔 불러바드 어딘가로 배치됐는데 완전 혼돈상태(chaos)였다. 순찰임무를 맡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여럿이 몰려다니면 사고를 저지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뭉쳐 다니지 못하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데이비드 발렌틴(현 샌타애나 교육구 경찰국장) 당시 새내기였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선배들과 함께 LA다운타운에 배치되었다. 임무는 소방관과 긴급복구 인력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폭도들이) 열쇠없이 가게 들어가(무단침입)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돌과 물병을 던지고 야유를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항상 방패와 보호장비를 착용했던 기억이 난다. 신승우 기자 gowest@koreadaily.com

2012-04-22

[내가 겪은 4.29 폭동] 4.언론인 이경원씨

우리는 잊혀져도 사이구(4.29)는 기억해야지요. 그게 여러분 사이구 세대 자녀들의 할 일입니다." 한인 1세대 영어권 기자로 활약한 이경원(84)씨는 20년 전 4.29 LA폭동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보도한 언론인 중 한명이다. 그가 본 LA폭동의 원인은 단순히 로드니 킹을 폭행한 경찰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흑인 소녀 나탸사 할린스를 사망케 한 두순자씨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기 때문은 아니다. 이씨는 "80년대 초부터 흑인 커뮤니티에서 발행하는 신문들마다 '한인 상인들이 흑인지역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꾸준히 보도됐었다"며 "심지어 일부 신문에선 정부에서 한인들에게 기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루머성 기사도 나왔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왔던 삶에 대한 아픔을 다 치유하지 못했던 흑인들은 이런 기사들을 통해 한인들에 대한 반감을 차곡차곡 쌓았다"며 "하지만 영어구사 문제 등의 이유로 커뮤니티간의 대화는 없었고 서로간의 불신만 커지다보니 폭동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폭동으로 불탄 상점들은 재개발 등의 이유로 복구됐지만 커뮤니티간의 골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강조한 그는 "사이구의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 만이 미래의 한인사회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예로 나치 전범을 아직도 추적해 처벌하고 피해자를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는 유대인들의 역사보존 활동을 들었다. 또 이씨는 "연방의회도 2차 대전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던 과거를 사과했다. 또 일본 커뮤니티는 LA다운타운에 박물관을 건립해 당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 역시 이같은 절차를 밟아 사이구에 대한 역사를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이제 LA시의 주인은 이민자 커뮤니티다. 백인과 흑인으로 나뉘던 패러다임은 없어졌다"며 "우리의 역사를 미국 사회에 올바르게 전달해 당당하게 정부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은 2세와 3세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한인사회가 4.29 LA폭동을 다각도로 되돌아보는 행사들을 많이 진행하고 있어 뿌듯합니다. 하지만 행사로만 그치면 안됩니다. 책임을 묻고 역사를 바로잡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장연화 기자 yhchang@koreadaily.com

2012-04-20

[내가 겪은 4.29 폭동] 피해자 한명숙 씨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상처는 아물어 가네요." 지난 1992년 4.29 폭동의 피해자 한명숙(71)씨는 아직도 20년 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아니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당시 한씨는 8가와 버논 인근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었다. 1989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갑작스레 경영 일선에 나선 것. 인생의 동반자를 잃은 슬픔과 충격 속에서도 한씨는 리커스토어를 지켰다. 하지만 1992년 봄 그는 더이상 리커스토어를 지킬 수 없었다. 상실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4.29 폭동이었다. 한씨는 "리커스토어 일을 도와주던 조카가 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길래 영문도 모른 채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라며 "크렌셔 길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올 때 이미 길가에는 흑인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그날 밤 단골 고객이던 흑인 친구한테 연락을 받았다"라며 "그 친구가 '가게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을 했는데 군중을 막아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폭동 다음날 가게는 잿더미로 변했다. 한씨 이야기는 당시 LA타임스에도 크게 보도됐다. 카니 강 기자가 한씨를 밀착 취재했다. 남편을 잃고 가게까지 날린 한씨는 망연자실했다. 피해액은 8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씨는 타인종의 문화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그는 "폭동 이후 한 흑인 목수를 만났는데 '한인들은 백인들처럼 흑인들을 무시한다. 또 흑인들이 가게에 가면 한인들은 뭐 훔치는 것 없나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말하더라"며 "두 인종 사이에 오해하는 부분이 많았고 이 모든 것이 문화 차이와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후 한씨는 미국 문화와 더 친숙하려 노력했고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의사소통 능력도 키웠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백인 동네인 윌셔와 하우저의 한 고층빌딩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열고 후회 없이 일했다. 이후 간호사 경력을 살려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한씨는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왔다"며 "내가 선택하고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흑 관계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한씨는 "한흑 관계가 표면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깊은 바닥에서는 물과 기름의 관계"라며 "우리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한씨는 70대다. 빈손이나 다름없다. 연금에 의지하다 보니 때로는 경제적으로 힘에 부칠 때도 있다. 한씨는 "사람이다 보니 20년 전 그때 만일 경제적 손실이 없었다면 '좀 더 편한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며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충실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상우 기자

2012-04-19

[내가 겪은 4.29 폭동] 2.김봉환 LA시 주민국장

1992년 4월 29일 오후 4시. 흑인 트럭 운전사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LAPD 경관 4명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는 속보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당시 한인청소년센터(KYC.현 KYCC)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봉환 LA시 주민국장은 "한인타운에 폭동이 발생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는 말로 20년 전의 기억을 꺼냈다. 그의 직감은 바로 1년 전 발생한 두순자 사건 때문이다. 사우스LA에서 리커를 운영하던 두씨는 1991년 3월 19일 물건을 훔쳐가던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스와 몸싸움을 벌이다 총을 쏴 사망케 했다. 배심원은 유죄평결을 내리고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판사는 두씨에게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집행유예 판결을 내려 흑인 커뮤니티의 반발을 샀다. 김 국장은 "판결이 내려진 후 사우스 LA지역의 한인 리커스토어를 대상으로 한 방화 범죄가 발생했고 한인 업주들을 노린 총격사건이 잇따랐다"며 "총격을 당한 한인 업주들이 1년에 30명에 달했다"고 당시 긴장감이 팽배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두씨에 이어 로드니 킹 사건도 무죄로 결론이 나자 흑인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그 화살은 한인 커뮤니티로 향했다. 주방위군이 출동하기 전까지인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사흘동안 폭동으로 방화와 약탈을 당한 비즈니스는 2000곳. 이중 3분의 1에 달하는 700여곳이 한인 업주 소유였다. 한인 업소들의 피해 금액도 4억 달러에 이른다. 그는 KYC 직원들과 통역관 60명을 동원해 피해자를 돕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KYC는 직원 6명에 연예산 30만 달러 규모에 달하는 청소년 상담 및 애프터 스쿨 프로그램 운영이 주 업무였다. 김 국장은 "당시만 해도 커뮤니티에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1.5세들의 활동이 많지 않았다"며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일했을 것"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제대로 보상을 받은 한인 피해자는 많지 않다. 김 국장은 "적십자 연방재난관리청(FEMA) 한국정부 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결국 피해 가정당 4~5만 달러 지원금을 지급하는데 그쳤다"며 "한인업소들이 보험가입도 제대로 안 돼 있었고 세금보고 기록도 없어 정부 지원이 쉽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폭동이 가라앉은 후 올림픽에서 시작된 한인들의 평화 행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그는 다인종 연합회 국장직을 거쳐 2008년부터 한인으로는 처음 시정부 산하 주민국의 수장으로 임명돼 산하 90여개 주민의회를 관리하고 있다. 또 내년에 실시되는 시의회 선거에는 13지구 시의원직으로 출마할 예정이다. "타 아시안 커뮤니티에 비해 한인 커뮤니티에는 비영리재단이 많고 활동적이라 서로 힘을 합친다면 커뮤니티의 더 큰 성장을 일구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 그는 앞으로 10년 후 한인 커뮤니티의 모습에 대해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선거구 재조정 활동을 보면서 한인 커뮤니티의 미래를 봤습니다. 여전히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은 부족하지만 커뮤니티가 함께 일하고 성장하는 시로 만드는 데 한인 커뮤니티가 리더 역할을 해낼 것을 믿습니다." ☞김봉환은… 뉴저지 출신으로 보스턴 칼리지와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부터 10년동안 한인 청소년회관(KYCC) 관장을 지내다 LA다운타운을 기반으로 한 다문화연합회 국장 패서디나 주택서비스 국장직을 거쳐 2008년부터 LA시 주민국 국장으로 임명돼 근무하고 있다. 장연화 기자

2012-04-18

[내가 겪은 4·29 폭동] 1. 에밀 맥 LA시 소방국 부국장

오는 29일로 LA폭동이 발생한 지 꼭 20주년을 맞는다. 폭동을 통해 부모들의 고난을 지켜본 1.5세와 2세 한인들은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을 버리고 목소리가 되기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1세들은 힘을 합쳐 한인타운 재건에 힘을 모았다. 그 결과 현재 한인타운은 정치적, 사회 및 경제적 성장을 일궈왔다. 폭동 현장을 경험한 한인들을 찾아 20년 전의 사건을 되돌아봤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6시 사흘 뒤면 결혼식이었다. 신혼여행 꿈에 부풀어있던 소방대원은 이날도 약혼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사우스 센트럴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프리웨이를 탔다. 110번 남쪽 방면 프리웨이를 타고 달리는데 오른쪽에 연기기둥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불이 났나? 소방대원이라는 의무감에 눈길을 거두지 못했지만 동료를 믿으며 프리웨이를 계속 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연기기둥이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1992년 4월 30일 새벽 0시30분 긴급 출동 호출이었다. 불기둥은 LA를 휘감고 있었다. 불을 다 끄기엔 인력이 너무 모자랐다. 출동하기 전 소방국장은 전 대원들을 불러 방탄조끼 착용을 지시했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국장을 바라봤다.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두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라며 동료들과 농담처럼 인사를 나눴지만 가슴에 남았다. ▶1992년 4월 30일 오후 2시 밤새 불을 껐지만 새롭게 불이 나는 곳은 늘어만 났다. 지쳐갔지만 멈출 수 없었다. 8가와 버몬트. 한인타운에 드디어 들어섰다. 버몬트의 한 한인 업소가 활활 타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준비하는데 길 건너편에 차량 두대가 스르르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흑인 7~8명이 차 안에서 내렸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총을 꺼내더니 우리가 서있던 쇼핑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소방대원들이 바로 눈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쇼핑몰 안에 있던 한인 업주들도 나와서 함께 총격전을 벌였다. 동료들과 나는 소방차 뒤에 숨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현장을 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총을 쏘던 흑인들은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흑인 이웃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마음이 아팠다. 에밀 맥 LA시 소방국 부국장이 돌아본 20년 전 LA폭동의 모습이다. 흑인 가정에 입양돼 성장한 맥 부국장은 지금도 스스로를 '한인이자 흑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모님과 형제들은 사랑이 넘쳤으며 입양아라는 사실이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며 "특히 인종차별운동이 한창이던 때 흑인 부모에게 입양된 덕분에 평등사상을 배울 수 있었고 인종에 상관없이 많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맥 부국장은 하지만 LA폭동을 통해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의무감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의무감을 갚기 위해 다인종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기 위해 내년 LA시의원 선거에서 13지구 시의원 후보직에 도전하게 됐다는 맥 부국장은 "한인 커뮤니티와 흑인 커뮤니티 라틴계 커뮤니티와 함께 일하면서 화합을 일궈내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장연화 기자

2012-04-17

"20년전 폭동 진원지 LA서 4·29관련 교육 거의 없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4.29의 진원지인 LA에서 정작 LA폭동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LA타임스는 16일자에서 올해로 LA폭동 발생 20주년을 맞지만 통합교육구 내에 이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르치는 내용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킨 학교는 극히 드물다고 꼬집었다. 신문은 각급 학교마다 학력평가 시험 문제에 나오는 내용만 지도하는데 몰두해 학생들이 LA폭동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LA폭동에 대한 내용은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규정하는 사회과목 커리큘럼에 포함돼 있지 않아 LA통합교육구(LAUSD)도 폭동에 대한 내용을 수업시간에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예로 8학년 미국역사 과목에서는 1960년대 발생한 와츠 폭동과 1970년대 취임했던 닉슨 대통령의 시대를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 1992년 LA폭동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각 학교에서는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카슨고교의 메리 웨이 교사는 "학력평가 시험에 출제되는 내용만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며 "LA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데 심적인 압력은 받고 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지금 고등학생들은 LA폭동 당시엔 태어나지 않았던 학생들"이라며 "이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LA폭동이란 사실과 그 중요성은 사라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장연화 기자

2012-04-16

[프리즘] 폭동20돌…'잠자던 호랑이' 깨어나 외치다

'하나의 선거구' 운동 좌절은 두번째 정치적 각성 계기 2세들, '시스템 변화 운동' 시작 13일 뒤면 4.29폭동이 일어난 지 꼭 20년이 된다. 과속으로 달리던 흑인 로드니 킹을 체포하며 경찰봉 등으로 구타한 백인 경찰관 4명이 3명 무죄 1명 재심사 평결을 받자 분노한 흑인들은 시위를 나섰고 해가 지기 전에 폭동으로 번졌다. 사우스 센트럴과 한인타운의 한인 상점들은 고스란히 약탈과 방화를 당했다.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인들은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총격전까지 벌어야했다. 성문에 불이 나자 불을 끄려 연못의 물을 퍼가는 바람에 재앙을 당했다는 연못의 물고기. 한인들이 그랬다.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아메리칸 드림 공식은 폭동으로 깨졌다. 정치력 없는 번영은 언제 모래성처럼 무너질지 모른다. 한인들의 첫번째 정치적 각성은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내고서야 찾아왔다. 그후 20년 동안 한인 커뮤니티의 현안은 언제나 정치력 신장이었다. 타인종과 교류하고 투표 운동을 벌이고 정치인 배출에 애썼다. 이만 하면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웠다는 자신감이 들 만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폭동 20년 되는 해 한인들은 다시 정치적 패배를 경험한다. 최근래 한인 커뮤니 최대의 정치적 현안이었던 '하나의 선거구'가 무산됐다. '하나의 선거구'는 그 자체로 지난 20년간 한인들의 정치적 각성과 역량의 축적도를 보여줬다. 4개의 선거구로 나뉜 코리아타운을 하나로 통합해 한 선거구에 편입시키자는 주장은 분명 '투표하자'는 운동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한인의 투표력을 한 곳에 집중할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를 고민한 한 차원 높은 운동이었다. 이 중요한 운동이 하필이면 폭동 20년 되는 해에 실패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과정은 꼭 절망스럽지 않았다. 지는 것도 때로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잘 져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는 과정에서 한인들은 좌절이 아닌 각성을 보여줬다. 주간지 'LA 위클리'는 지난 2월 1일 윌셔 이벨극장에서 열린 공청회에 모인 한인들을 '잠자던 호랑이'라고 표현했다. 기사에서 로이드 리 변호사는 "코리아타운의 정치적 각성 (현장)에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타인종의 눈에 선거구 문제를 계기로 한인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있다고 보인 것이다. 이 주간지는 "LA시 전역에서 선거구 재조정안을 놓고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으며 코리아타운은 그 진앙지"라고 표현했다. 한인 커뮤니티가 선거구 싸움에서 그저 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로이드 리 변호사는 공청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대표성 없이 그저 돈이나 건네주는 침묵하는 이들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나의 선거구' 운동을 해온 또 다른 2세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인 1세들은 소송을 피한다. 어떤 문제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2세들은 앞으로 나와 말한다. 타협하지 않겠다고." 두 사람의 발언은 '하나의 선거구' 운동에서 두 가지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하나는 2세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 하나는 지금까지 말하기 꺼려했던 정치인의 선거자금 모금 방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29폭동은 1세들에게 '하나의 선거구' 실패는 2세들의 정치적 각성 계기가 됐다. 정치적 좌절-각성-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흡사하다. 1세들이 폭동 뒤 '평화의 행진'으로 결집했듯 2세들은 공청회에서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하나의 선거구'는 실패했지만 한인 커뮤니티는 정치적으로 분명 성숙하고 있다. 4.29 폭동 20돌. 한인들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딛고 일어나 전진하고 있다.

2012-04-15

4·29 폭동 20주년…한달간 한인사회 다채로운 행사…"기억만 말고 우리 힘 키우자"

민족학교가 4.29 폭동 20주년을 맞이해 LA를 중심으로 4월 한달간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한다. 민족학교는 12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4.29 시민소요 사태는 인종 차별 및 경제적 불평등, 타인종과의 유대, 시민참여 의식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며 "20주년을 맞아 지속적인 유권자 등록과 시민권 신청 등 한인의 힘을 키울 수 있는 행사를 여는데 초점을 맞췄다"라고 밝혔다. 민족학교 주최 대표 행사로는 오는 14일'서류미비 이민자 학생 대학 입학 설명회'를 비롯해 27일 투표 방법 설명회, 28일 시민권 신청 세미나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는 23일까지 LA를 중심으로 어바인, 리버사이드, 포모나, 노스리지 등에서 대학생 유권자 등록 대회를 개최하며 별도로 민족학교 사무실에서 매일 유권자 등록 및 교육을 실시한다. 윤대중 사무국장은 "4.29 사태의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타민족과 연대해 조직화 돼야 하고 정치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라며 "시민 참여와 투표권 행사 그리고 이민자 권익 옹호까지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올바른 미국사회를 이끌어 나가자"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민족학교는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이하 미교협)와 시카고의 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도 연계해 미 전역에서 한인들을 위한 4.29 폭동 20주년 기념 행사를 후원한다. 미교협 측은 "LA에서 시카고와 워싱턴 DC에 이르기까지 미주 한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며 "단지 역사로서 4.29 사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우리 커뮤니티의 힘을 강하게 하는데 계속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의: (323) 937-3718 "LA서 인종 갈등 사라졌다" 응답자 68% '잘 지낸다' 인종별 답변 10% 이상 차이 반목 풀었지만 숙제는 여전 4·29 폭동 20주년을 맞아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이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LA시민 대다수가 인종 간 갈등이 없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일 LA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번 조사에서 '현재 서로 다른 인종간에 잘 어울려 지낸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8%가 '잘 지낸다(well)'고 답했다. 인종 간 갈등이 심하다(badly)고 답한 사람은 27%였다. 반목이 사라졌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지만 인종별 체감지수는 달랐다. 백인들은 76%가 인종 간 갈등이 없다고 답한 반면, 흑인은 66%, 라티노와 아시아계는 64%만 다른 인종끼리 잘 지내고 있다고 응답해 10% 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또 LA가 20년 전보다 더 안전해졌느냐는 질문에 백인의 41%는 '그렇다'고 답했지만 흑인과 아시안은 달랐다. 폭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흑인과 아시안은 각각 40%, 36%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해 대조를 이뤘다. 4.29 폭동은 당시 백인 경찰관이 흑인인 로드니 킹을 무차별 구타하는 영상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흑인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54명이 숨지고 2300명이 다치는 참사를 낳았다. 폭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LAPD에 대한 신뢰는 이번 조사에서 70%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지만 LAPD가 잘 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002년 78%에 비해 다소 하락했다. LA인권위원회 위원장인 폴 크루즈 UCLA 교수는 “이번 설문 조사는 인종간 갈등이 상당히 완화됐다는 고무적인 사실과 함께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설문 조사는 LA시민 1605명을 대상으로 조사됐다. 최상태·박상우 기자

2012-04-12

[시론] 4·29 폭동 20주년의 다짐

이제 곧 4.29폭동 20주년이 된다. 20년전 나는 30세 초반의 젊은 변호사로서 어린 두 딸과 막내 아들을 임신 중이던 아내와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때만 해도 학군 좋은 백인 지역의 큰 저택에 살며 유럽산 차를 소유하는 것이 한인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인 줄 알았다. 또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잘 납부하면 평등한 권리와 보호를 정부로부터 받으면서 미국 시민이자 자랑스러운 1.5세로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4.29 폭동은 이런 순진한 나의 생각을 산산조각냈다. 1992년 4월 29일 수요일 아침. 윌셔불러바드에 위치한 사무실에 평상시처럼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했다. 로드니 킹을 구타한 LAPD 백인 경관들의 무죄판결이 발표되면서 흑인 사회의 동요와 시위 소식을 들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출근길 방송에서 흑인 폭도들이 한인타운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형들이 운영하고 있는 업소가 걱정됐다. 그날 목요일(4월 30일) 오후부터 토요일(5월 2일) 오전까지 2박 3일 동안 나는 두 형과 함께 업소를 지키며 한인들이 피와 땀으로 일궜던 업소와 소유 건물들에 약탈과 방화로 불기둥이 솟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폭도들에 대한 두려움과 LA시와 미국 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으로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나를 더 허탈하고 분노하게 만든 것은 LAPD를 포함한 시 정부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한인타운과 한인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주 7일 일하며 세금을 내면서 한인타운을 발전시켜왔고 또 선거철에는 후원금을 열심히 낸 우리 한인 사회에 돌아온 것은 외면과 폭동 피해에 대한 책임 전가 뿐이었다. 일부 흑인 정치인들은 한인 사업가들이 흑인 커뮤니티에서 돈만 벌어가며 흑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했기 때문에 폭동을 당했다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했다. 20년이 지난 오늘 나는 흰 머리가 보이는 중년으로 변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물질적인 성공과 사치스러운 삶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평등과 권리를 위해 싸우고 지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아가 이방인이 아닌 주인의식을 갖고 이 나라를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인사회가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한인타운은 제 2의 4.29폭동을 다시 안 겪는다는 보장이 없다. 올해는 미국 대통령 선거부터 시작해서 각 로컬 선거가 있다. 이제라도 1세들과 1.5~2세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합쳐 정치인 후원금 모금 활동과 유권자 등록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후보들을 당선시키고 동시에 반대해 왔던 정치인들을 낙선시키는 운동을 펼쳐 우리의 목소리를 주류사회에 전달해야 한다. 또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살고 있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더 환원하고 봉사해 타민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해 한인 권익신장에 기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각 교회 목사님과 지도자들이 지역사회 발전과 타민족과의 유대관계 개선에 더 많이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교인들에게 투표를 독려했으면 한다. 미국의 인권운동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교계에서부터 시작됐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2-04-09

청소하고 걸으며…LA폭동 20주년 되새긴다

4·29 LA폭동 20주년을 맞아 한인 커뮤니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화합과 사랑을 다지는 '마라톤 및 공원 청소' 행사가 28일 그리피스 공원에서 대대적으로 열린다. 파바월드, 메이크어위시(Make-A-Wish) 등이 공동 주최하고 중앙일보·라디오 코리아 등이 미디어 후원하는 이 행사는 이날 오전 8시부터 공원 청소에 이어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하이킹 구간 5마일을 걷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리피스 공원의 버드생추어리에서 진행될 마라톤 행사는 뛰는 것보다는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느끼자는 의미로 대회 이름도 '워커톤(Walk-A-Thon)'으로 정했다. 또 아직 남아있는 LA폭동의 아픔을 치유하자는 의미로 그리피스 공원을 청소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특히 이번 행사 수익금은 어린이 환자를 돕는 비영리재단인 메이크어위시 재단으로 전달돼 불치병에 걸린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쓰여지게 된다. 파바월드 강태흥 회장은 "LA폭동 20주년을 맞아 커뮤니티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며 "이번 행사가 20년 전 폭동의 아픔을 도약과 화합으로 승화시키고, 또 한인사회의 온정을 불우 아동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있는 한마당 잔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 회장은 이어 "이 행사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매년 지원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행사는 LA시 4지구, 10지구, 13지구 시의회 사무실, LA평통, 밝은미래재단, 한미연합회, 윌셔센터-코리아타운주민의회, 한인커뮤니티변호사협회, LA한인상공회의소, 한미경제개발연구소, 나성영락교회, LA한인축제재단, 미주3·여성동지회, 수요산악회 등 이 후원할 예정이다. 국제한인식품상협의회는 마라톤 참가자들을 위해 병물을 지원하며, 남가주한인레스토랑협의회와 남가주한인치과협회, 한국상사지사협의회(KITA) 등도 마라통 입상자들을 위한 상품을 후원할 예정이다. 가주한의사협회는 이날 현장에서 앰뷸런스를 대기시킨 채 의료지원에 나선다. ▶참가 문의: (213)252-8246 장연화 기자

2012-04-05

LA폭동 에세이 콘테스트 참가 접수

4.29 LA폭동 20주년을 기리기 위한 에세이 콘테스트가 열린다. 이번 콘테스트는 한미연합회(KAC-LA.사무국장 그레이스 유)이 주최하며 제목은 '4.29 폭동 기념 에세이 콘테스트'다. 올해 주제는 '다양성은 우리의 힘(Diversity is our strength)'으로 콘테스트에는 LA통합교육구(LAUSD) 교육위원회 모니카 가르시아 위원장이 함께한다. 에세이 콘테스트는 한인 1.5~2세들에게 한인 커뮤니티는 물론 LA의 현대사에 영향을 미친 4.29 폭동을 이해하고 특히 20주년을 맞아 잊혀져 가는 4.29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또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콘테스트에 참가하려면 500~1000자 길이의 영어 에세이를 신청서와 함께 제출하면 된다. 신청은 4월 15일까지 이메일(esther@kacla.org)로 하면 된다. 올해는 참가 대상도 기존 고등학생 대학생에서 중학생과 영어 미숙련 학생(LEP)으로 확대했다. LA카운티 학교에 재학 중인 7~12학년생과 미 전역 대학생 그리고 LEP 학생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심사는 7~8학년 9~10학년 11~12학년 대학생 LEP 등 5개 그룹으로 나뉘어 이뤄지며 대상 1명 1000달러를 비롯해 100~500달러 총 1만 달러의 장학금이 주어진다. 시상식은 4.29 20주년에 맞춰 오는 29일 오후 1시~4시 열린다. ▶문의: (213) 365-5999 www.kacla.org 이재희 기자

2012-04-04

[사설] 폭동 20주년 맞는 한인사회

4.29폭동 2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진다. 다큐멘터리 상영을 비롯해 주민회의 주최로 '사이구를 기억하자'라는 행사가 개최되고 폭동 당시 관련자들의 간담회 피해자의 증언 등도 소개될 예정이다. 또한 4.29폭동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행사도 준비돼 김영옥연구소 주최로 한인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세미나도 열린다. 4.29 폭동은 한인타운의 역사이자 아물지 않은 상처다. 그런 20주년을 맞아 1.5세와 2세들이 주축이 된 행사가 많은 것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지난번 선거구 조정 과정에서 정치력 신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번에도 부모 세대가 겪었던 4.29폭동의 아픔을 통해 한인커뮤니티 정치력 신장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 폭동을 겪고 이제 30~40대의 나이에 이른 세대들이다. 그래서인지 자신들의 자녀에게 폭동의 역사와 교훈을 전하는데도 적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트위터 이메일 페이스북 등의 조직적인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4.29 행사 참여와 준비를 유도하고 있다. 이제까지 1세 중심으로 이뤄졌던 폭동을 기리는 행사가 이렇게 1.5세와 2세들이 중심이 된 행사로 발전해 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또 우리의 시각을 반영해 '사이구'를 바라보고 정의하려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미주 한인이민사에서 4.29폭동은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의미에서 전환점이 됐던 사건이다. 1세들에게는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폭동이지만 2세들에게는 객관적인 역사로 남겨야 할 과제가 있다. 이번 20주년 행사를 통해 4.29폭동의 교훈과 의의가 후손들에 의해 바르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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